rootless 근본 없음에 대한 소고

2019.07.18

근본 없음에 대한 소고


우리 건축계 뿐 아니라 대부분의 건축적 논의는 태생적으로 엘리트적이다.
즉 건축적 논의의 대부분은 일상과 유리되어 엘리티즘이나 아카데미즘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우리 건축은 자발적 근대화의 길도 걷지 못하고 타의에 의한 여러번의 단절의 시대도 겪으면서
서구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세계 건축 주류 문화의 주변으로 밀려나, 이 차이를 한번에 극복하려는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꿈을 꾸어오며 더욱 엘리티즘으로 흘렀다. 주류 건축계는 한편으로는 서구 모더니즘
과 그 이후의 건축 사조의 흐름에 뒤쳐질세라 끊임 없이 외부로 향한 노력들을 해오면서 또 반대로
내부적으로는 우리 것도 세계적이라며 아직도 답이 모호하기만 한 일명 ‘한국성’에 대한 탐구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은 공통적으로 자격지심을 기저에 깔고 끊임 없는 자기부정과 자기과시의 모순적인 상황에 건축가들
을 노출시켰고 건축가들은 거의 정신분열적 상황에서 우리것을 마냥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고 서구
건축 사조와 자신의 건축을 온전히 공명 시킬 수도 없는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분열적 상황이 머리와 손으로는 서구 건축을 하면서도 가슴으로만큼은 우리 건축을 품겠다며 실무
적으로는 써먹을 수도 없는 고건축 답사를 건축가들의 필수 항목으로 꼽아 계절마다 전국 산지의 명승고적을
찾아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하는 등의 이중생활을 하는 건축가들을 수십년째 목도해오게 된 배경이다.

꼭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건축 결과물만 놓고 보더라도 당대 서구에서 유행하는 사조의 모방물에 지나지
않는 깊이 없는 건축을 양산하면서도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거나, 제대로 정의 내리지도 못하는 한국성이
라는 대의를 앞세워 시대에 호응하지 못하는 시대 착오적인 건축물을 계속 만들어온 것이 이런 분열적
상태의 우리 건축이 걸어온 길임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분열적상태의 건축 논의는 건축지식 생산과 건축의 실천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달리는 항구적인 평행 운동의 상태를 야기했다. 지식 생산은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자기만족적 담론 속에서 겉돌기를 반복하고, 건축 실천은 건축 논의가 제시하는 서구적 이상이라는 요구에 답하지 못하는 반신 불구의 상태로 바라보게 된 현재의 건축계 상황이 그 결과이다. 이 결과들이 건축계 내부의 논의로 끝나는 것이라고 하면 크게 문제 삼을 것도 없지만 건축의 영향력이라는게 사회, 경제, 문화 전반, 그리고 일상의 영역에까지 걸쳐 있다보니 우리끼리 이해하고 넘어갈 성질이 애시당초 아닌 것이다.

이런 배경을 놓고 현재 우리 건축계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진단해 본다면 ‘근본 없음’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제대로 뿌리내린 토양이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 근본 없음은 혹은 토양 없음은 우리가 가지지 못 할 것에 대한 추구에서 기인함이 명백하다.
우리 것이 아닌 서구의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모든 건축 사조)과 우리 시대의 것이 더 이상 아닌 박제된
역사 속에서 찾는 한국성.
이 근본 없음은 경제 성장기와 활황기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성장기는 먹고 사는 문제의 시급함에 밀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고 90년대까지의 활황기에는
풍부한 자본이 이런 근본 없음을 덮을 만큼의 화려한 스펙타클의 외양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비로소 경제 침체기 혹은 저성장기에 들어서면서 근본 없는 건축의 민낯이 드러나게 됐다.
이 근본 없음의 문제를 직면하게 된 지금 이 문제의 해결안 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민은 해 볼수 밖에.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예상보다 가까운 곳에 답이 있을 수도 있다. 
건축 엘리트가 다루지 않는 영역. 
여기. 지금.
생각해보면 건축 논의의 중심에서 ‘여기-지금’이 빠져 있었던 것에 문제의 시초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저기(서구)-지금’이나 ‘여기-그때(조선시대 언제쯤?)’, 혹은 심지어 ‘저기-그때’가 우리 건축 논의를 지배해온
것이 문제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건축 논의에서 ‘여기-지금’을 다룬다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우리의 건축 현실에서.
이는 지금까지 건축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관심에서도 벗어나 있어, 있으면서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온, 우리 주변에 편재해 있는, 있는데도 들여다 보려하지 않는, 대부분 일상이 벌어지는 배경이 되는, 일상의
건축물들을 다루는 것에 다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상의 건축에 대한 건축계의 논의는 계속 있어 왔지만 이는 그와 맥을 조금은 달리한다.
단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건축물의 계획에 있어 건축의 가치를 사용자의 일상성에 둔다는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그대로 물리적 구축물로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수 있는 일반적인 건축물을 대상으로 해보자 말하는 것이다.
몇몇 저명한 엘리트 건축가가 해외에서 습득한 현학적인 이론을 앞세워 지은 건축보다는 생활환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건축물에서 우리 건축 현실을 대변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해 볼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담긴 진단이다.

이를 대상으로 여기-지금의 논의는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접근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접근,
즉 건축물의 형태와 생산과 관련된 접근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우리 건축 환경에 대한 다양한 현실들이 관찰되고 연구되고 분류되고 분석되어 어떤 건축적 사실로 귀결될지
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단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 건축이 서 있는 토대의 근거를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을 따름이다.
(믿음의 영역에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 이런 시도가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조금 비약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지금의 문제를 다루려면 여기-지금의 상황을 대변하거나 설명할 수있는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문제에 대한 논리적 귀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논의 대상들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근래에는 그래도 제대로된 자본의 투입과 설계, 그리고 괜찮은 기술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건축물들은 척박했던 시대에 궁여지책으로 지어진 상태로 그대로 우리 환경이 되어왔다.
과연 이런 불완전한 시대의 건축물들에서 우리 건축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줄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이런 논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애시당초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건축공부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겪게되는 우리 건축 환경의 여기-지금에 대한 평가절하의 분위기만이라도
보다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램에서 하는 얘기에 가깝다.
건축 논의의 시작이 여기-지금으로 자리 잡기만 하더라도 조금더 우리 건축이 설 수 있는 토대가 단단해질
가능성이 생기리라는 기대에서 하는 말이다. 

적어도 프리츠커 수상 프로젝트라는 전대미문의 정책이 공표되는 현실이나,
조선시대 양반가의 한옥 양식을 거의 유일한 한옥 모델로 설정해서 시대 착오적인 한옥 생산하며 전통을 박제하는 현실보다 나은
대안적 현실을 생각해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주변의 일반 건축에 대한 논의는, 이것이 좋으나 싫으나 버릴 수 없고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서구 도시 환경과 비교하여 척박하고 혼란스럽기 그지 없고, 단절된 역사와 개발 광풍으로 인해 통일된 고유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 역시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역사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 건축이 근본 없음의 진단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단절 자체나 역사성의 부재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건축의 조건으로 삼기 보다는 부정해 버린 데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서구 건축이 흔들림 없는 그리스 로마 건축을 규범으로 삼아 근래까지도 그에 대한 긍정과 부정과 재해석이라는
변증법적 발전에 기반을 두게 된 것은 그리스 로마 건축 규범이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그들이 살아온 역사라는 사실 그 자체에서 기인한 점도 크다고 본다.
정복과 피지배의 역사가 뒤엉켜 있으면서도 그 것이 그들 역사라는 사실 자체는 달라지지 않으며
그 가운데 널리 공유하게 된 유럽적 건축 규범 또한 그들의 역사와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온 우리 건축이 그들이 만들어온 건축 형식을 비판없이 따르겠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을 따르는 것은 단지 모방의 범주를 벗어 날 수 없게 만들어 이런 근본 없는 사태를 야기시킬 뿐이다.

설령 그들을 따라 우리 건축도 끊임없는 변증법의 발전 원리를 적용하려 해도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의 규범으로 삼을 건축은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이를 한국성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정의 내리려는 것인데 사실 이는 불가능한 시도에 다름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규범을 삼을 흔들리지 않는 원본으로서의 대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자체가 서구의 아이디어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긍정하고 부정할 원본도 재해석할 원본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따르는 것을 선택했다.
단지 차이라면 그들처럼 건축형식의 부정과 재해석을 방법으로 택하는 대신 그런 건축이 없는 우리는
우리 현실 자체를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보고 외면하고 부정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과 다른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건축 논리를 만들어야 했지만
조바심과 자격지심이 서투른 판단을 하게 했고 제때를 놓치게 한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 또한 우리 건축이 걸어 온 길이니 포용하고 가야 할 우리 건축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대중 문화와 상업 문화에서 일상의 옛것에 대한 향유가 유행이 되어 레트로니 뉴트로라는 단어로 회자되고
있는데 어떤 시대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인지 건축계에서도 일단의 젊은 건축가들 사이에서 단순한 취향적 접근을 넘어
옛 일반 건축물들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경향이 포착된다.
이 블로그도 그렇고, '파사드 서울’의 출판 등으로 결과를 내놓기도 했지만 아직은 보다 느슨한 수준에서
사진을 찍고 관찰하는 정도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주거 건축의 개발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소규모 재개발이 상식이 되면서 근대기부터의 소규모 주거 형식의
역사에 대한 연구서가 다수 출판되었다. 

건축계의 관심은 아직 개별적 건축 요소에 대한 유미주의적 접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해 직접적인 건축(논의)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고, 학계의 관심은 건축 형식보다는 주거의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둘다 아직은 건축구축적 측면에서 유의미한 결과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적어도 건축계의 관심은 형태와 그 생산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 여기-지금의 논의를
시작하는 지점으로 보기에 크게 무리가 없어보인다.
이런 흐름이 한 순간의 유행으로 끝날 가능성도 없지 않겠지만 우리 건축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하는 건축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건축가들이 등장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변화의 단초는 마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리츠커 수상 프로젝트라는 전대 미문의 발상 자체도 경악스럽지만
그 대안이라고 내세운 해외 인턴 프로그램 또한 경악스럽기는 매 한가지이다
지금 우리 건축계가 해외 유학파나 해외 건축 경험자가 없어서 이 모양일까
그 어느때보다 해외파로 분류되는 건축가가 많은 시기일 것이다
오히려 너무 해외로만 맹목적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내부적인 논의들이 부실해진 것은 아닌지
자생적 건축 논의들이 발생할 수 있는 토대가 너무 허약해 진 것은 아닌지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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