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던을 이끈 열 개의 규범적 건축 : 1950-2000,
피터 아이젠만 지음, 서경욱, 고영선, 박순만, 박훈태, 나궁돈기 옮김, 서울하우스, 2014
Ten Canonical Buildings: 1950-2000 by Peter Eisenman, Rizzoly, 2008
이 리뷰는 전반적으로는 한글 번역본을 부분적으로 영문본과 비교하여 읽은 후 적은 것이다. 한글 번역본에 의미가 닿지 않는 부분이 다소 있어 원문과 비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발췌하여 적은 부분에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한글 번역본을 그대로 따른 것이며 원문으로 확인하여 수정한 부분은 밑줄로 표시하고 영어 원문을 괄호속에 곁들어 두었다.
앞서 아이젠만의 다른 책 Lateness 리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 두 책은 연작으로 이해해도 될만큼 같은 방법론으로 현대건축을 비평적으로 다루었고 그 외 비슷한 관점과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이미 영어본의 경우 출판된지 15년 가량 되었고 한글 번역본도 8년이 되어 이 시점에 다루기에는 시의성이 적절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개념은 시간성 혹은 시의성에 크게 좌우되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에 출판된 Lateness의 전작으로서의 의미를 고려하면 출판된 연도와 상관없이 둘을 함께 읽었을 때 얻어 가는 것이 적지 않다.
앞선 글에서도 적었듯 이 책은 'Lateness'의 전조라고 이해될 만한 아이디어인 'undecidability - 비결정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모던 건축에 대하여 이단적 혹은 위반적이라고 할 만한 건축적 표현들을 담지한 일부 포스트모던 건축물들을 규범적 건축물이라는 규정과 전제 하에 다루고 있다. 아이젠만이 다루고자 한 내용을 책의 서문을 중심으로 리뷰해 본다.
우선 이 책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대상이 된 10명의 건축가의 10개의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1. 루이지 모레티, 일 지라솔레 주거 /Luigi Moretti, "Il Girasole", 1947-50
2. 미스 반 데 로에, 판스워스 주택 /Ludwig Mies van der Rohe, Farnsworth House, 1946–51
3. 르 코르뷔제, 스트라스부르 의사당 /Le Corbusier, Palais des Congrès-Strasbourg, 1962–64
4. 루이스 칸, 아들러 주택, 드보어 주택 /Louis I. Kahn, Adler House and DeVore House, 1954–55
5. 로버트 벤추리, 바나 벤추리 주택 /Robert Venturi, Vanna Venturi House, 1959–64
6. 제임스 스털링, 레스터 공과대학 /James Stirling, Leicester Engineering Building, 1959–63
7. 알도 로시, 산 카탈로 공동묘지 /Aldo Rossi, Cemetery of San Cataldo, 1971–78
8. OMA/렘 콜하스, 주시우 도서관 /Rem Koolhaas, Jussieu Libraries, 1992–93
9. 다니엘 리베스킨트, 유대인 박물관 /Daniel Libeskind, Jewish Museum, 1989–99
10. 프랭크 게리, 루이스 빌딩 /Frank O. Gehry, Peter B. Lewis Building, 1997–2002
위대한 작품 vs 규범적 건축물
아이젠만이 서문에서 얘기했듯 이들 건축물들은 각 건축가들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아이젠만이 이들을 자신이 규정한 규범적 건축물의 범주에 들어가는 지 여부를 두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유명 작품 목록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아이젠만의 해석은 다르다. 이에 대해 아이젠만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규범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위 위대한 작품(great work)이라는 개념과 종종 혼동된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규범이 반드시 위대한 작품의 목록은 아니며 규범적인 건물이 반드시 위대한 작품인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규범과 위대한 작품은 거의 관계가 없다. 위대한 건축물은 처음 규정된 유일하고 지시된 해석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나, 이 책의 맥락에서 규범적 건물은 비판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비결정적이거나 때로는 산만한 독해를 전제로 한다. (A great building may be just that, requiring no more than an initial look that defi nes a single, directed reading, while a canonical building presupposes in this context undecidable, often diffuse readings as a necessary condition of the critical) 이 책에서 보게 되듯이 위대한 건물의 정밀독해는 그 건물 자체에서 완성되는데, 요른 웃존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나 프랭크 게리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해석을 위해 외부의 참조가 거의 필요 없다. 건물이 참조한 것들을 돌이켜보거나 건물이 영감을 줄 것을 예측하는 독해를 요하는 규범적 건물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p.18)'
' 이러한 측면에서 위대한 건축물은 시대를 초월하는 데 반해, 규범적 건물은 시대의 특정 시점들로 구별된다. (In this sense, great buildings are timeless, while canonical buildings are identified with specific moments in time.)...........(중략).............규범적 건물은 고립된 대상으로서 연구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특정 시점을 반영하는 능력이나 이전과 이후 건물들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 책에 소개된 건물의 연구에 있어서, 각 규범적 작품은 뒤따르는 작품들, 즉 규범적이라 여겨지는 것을 재정의하는 작품들에 영향을 준다.........(중략).......규범적인 것은 이전의 작품에 의심을 던지고 개별 작품뿐 아니라 건축 일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즉 규범적인 건물은 정밀독해가 요구되는 반면, 위대한 건물이나 명작이라는 개념은 규범적 건물이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과 유연성이 부재한 채 역사의 한 시점에 침전된 개념이라고 문제시 된다 . (In short, while the canonical building requires close reading, it also problematizes the idea of a great building or masterwork as a historically sedimented concept, without the mobility and flexibility that canonical implies.(p.19)'
'위대한 건물은 아마도 자기 충족적이지만 규범적 건물을 그렇지 않다. 규범적인 건물은 이전과 이후에 걸쳐 외면적인 참조가 이루어지므로 외부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p.21)'
위대한 작품은 애초에 완성된 하나의 해석만을 요하며 한 시대를 대표해서 시간이 지나도 그 대표성이나 해석이 달라지지 않는 건물을 의미한다면, 규범적 건물은 역사와의 관계속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며 현재 규범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새로운 해석과 의심을 던지는 '역동적(p.15)'인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위대한 건축물과 명작이 시대의 중심에 위치한다면 규범적 건축물은 '가장자리와 돌출부(p.15)'에 위치한 무엇으로 본다. 또한 위대한 건축물이 시대의 정통성과 표준을 상징한다면 규범적 건축물은 그러한 정통성과 표준들에 대한 '이단적이고 위반적인 본질을 내포(p.15)' 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아이젠만에게 있어 규범적인 것은 위대한 건축물 혹은 명작과 근본적으로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관점으로 위의 건축가와 건축물들을 선정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Stan Allen의 Foreword 글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불문명한 선택기준을 추구한 데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아이젠만은 유명하거나 덜 유명한 건물이거나 그 속에서 아직 해석의 여지가 있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그곳에 집중한다. 확실히 아이젠만의 규범은 새로운 정설(a new orthodoxy)은 아니다. 규범이란 일반적으로 역사의 넘볼 수 없는 위대한 기념비를 확인하기 위해 회고함을 의미한다. 아이젠만의 규범은 반대로 예견적인 것으로, 미래의 기념비를 위한 초석을 놓는 행위이다. 그것은 또한 위에서부터 아래로 전수되는 익명의 규범이라는 개념과는 반대로 다소 개별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아이젠만'이 종국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아니다. (It is also—in contradistinction to the notion of an anonymous canon handed down from on high—somewhat idiosyncratic, and in the end, highly personal. For all that, it is surely not a teleology with “Eisenman” at its endpoint.) 그것은 보편적 규범도 개별적 계보도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한 건축가의 지적 경로에 대한 기록이자 미래의 다양한 다른 경로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여기 나오는 건물들은 비록 그 방식이 불완전하고 시험적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지점에 놓여있다. 바로 이것이 아이젠만의 뛰어난 통찰력인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건물들은 암시적 가능성이 있고 공개적으로나 잠정적으로 건축적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다음 저자가 작업을 완성하고 새로운 틈(break)을 만들어 후속 건축가 세대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p.12)'
규범/canon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규범에 대해 정의를 내린 부분을 더 들여다 보아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규범적이라는 용어는 건축의 역사를, 건축에서 영속성이라고 여겨져 왔던 것, 즉 주체/객체, 형상/배경, 솔리드/보이드, 부분/전체 관계들에 대해 끊임없고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다.(p.16)'
규범과 역사
이 문장에서 보듯 규범은 역사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역사와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도 더 들여다 보자.
' 규범이란 특정한 역사적 맥락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특정한 순간이나 시대정신 또는 이와 동등하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강령의 표현은 아닐 수도 있다. 규범적인 순간이란 패러다임 쉬프트라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패러다임 쉬프트의 개념이 반드시 규범적인 것의 개념에 잠재된 비판적(critical) 내용을 함의(implicate)하는 것은 아니다. (p.17)..............(중략)...................
이 책에 사용된 대로 규범적이라는 용어는 먼저 오늘날 건축의 주요 요소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의 기반을 제시하고 있다. 건축에서 규범이라는 개념은 역사 그 자체로서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형식적인 것에서 텍스트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서 수행적인 것에 이르는 정밀독해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규범이란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내러티브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서 해석하고자 하는 특정 담론을 시작하는 방법이다...............(중략)...................만약 규범이 학문의 중심에 대해 주변을 만들어낸다면, 그러한 독해는 규범에 대한 비판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주변을 새로운 규범적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규범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시점에서 규범으로 명명된 것에 대한 비평이 될 수 있다.(p.17)'
보다 구체적으로 1950년에서 2000년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시간적 범위를 다루는데 이 또한 이 시간대의 역사적 조건을 이용하는 것이지 일반적 역사서에서와 같이 역사를 내러티브 구조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루고 있는 시간대의 역사에서 규범적 순간을 구별해내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역사적 순간들을 모두 연구하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한다. 포스트모던 및 역사 서술에 대한 태도와 관련한 다음의 언급을 보자.
'이 책의 열 개의 건축물들은 역사를 설명한다기 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알려진 규범적 작품들의 진화를 정의한다. 형식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닌 정밀독해는 한 순간 포스트모더니즘 속에 남아있거나 규범적인 것이 되고 그와 동시에 주류 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이단적(heretical)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양식을 규정하는 말이 아니라 모더니즘 이후의 시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특히 모더니즘의 지배적 정밀독해 방식인 추상성에 대한 비판으로 설명되는 건축 개념과 관련한 태도를 반영한다. 1950년에서 2000년까지의 모든 건물들이 이 순간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열 개 건축물들은 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서로 다른 렌즈를 통해 읽혀지고, 함께 합쳐져 일련의 규범적 순간들을 정의하는 주장을 만들어 포스트모던 시기의 위반적 개념들을 대략적으로 규명한다.(p.17~18)'
'이 건물들은 개별적으로 규범적일 수 있으나 이들을 여기 모은 것이 소위 포트스모던 규범을 정의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다.(p.21)'
규범과 비판
규범과 역사의 관계 만큼 중요한 부분인 비판과의 관계 또한 더욱 명확하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규범적 태도는 비판을 통해 역사의 특정 시기에 통용되는 건축 개념에 틈을 내는 것을 방법론으로 하지만 모든 비판적 작품이 규범적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건축의 본질적인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비판인지에 따라 규범으로서의 비판을 판단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정의한 규범적인 작품과 비판적인 작품 사이의 차이는 더욱 미묘하다. 모든 규범적인 작품은 그 자체로 비판적이지만 모든 비판적인 작품이 규범적인 것은 아니다. 비판적인 것은 규범적인 것에 필요요소일 수 있지만 충분한 요인은 아니다. 이 책에서 비판적이라는 용어는 건축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중략).......비판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사이의 중요한 구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규범적인 작품은 연결(hinge)이면서 동시에 파열(rupture)이지만, 비판적인 작품은 주로 선대와의 단절(break)로서만 작용한다. 이 점에서 규범적이라는 말은 역사의 한 시기를 정의할 수 있게하는 단속(rupture)을 지칭한다. 규범적인 것은 그러한 파열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현재의 끊임없는 재평가이다.....(중략)....둘째, 규범적인 작품은 시간과 결부되어 있다. 역사의 특정 시기에 달려 있어서 건축가의 경력이나 건축적 담론에서 연결/파열로서 보이고자 한다.(p.21)'
텍스트적 독해
특히 이런 규범으로서의 비판에 있어 정밀독해는 텍스트적 독해를 통한 분석을 강조하고 있다. 건축의 형태, 형식에 대한 독해를 광학적(optical) 독해라고 보고 이를 통한 분석의 한계를 지적하며 스승인 Colin Rowe 에게서 배운 시각적(visual)적 독해를 마음이 보는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즉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아이디어(p.16)'를 보는 것을 강조한다. 이 때 데리다에게서 빌려온 텍스트적 독해 개념으로 '내적인 비평, 내러티브로서 자체의 지위를 의심하는 것'을 비판과 관련해 중심에 둔다.
'로우(Colin Rowe)는 그보다 나에게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이 함축하는 아이디어를 보도록 했다. 다시 말해 눈이 보는 것(광학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적게, 그리고 마음이 보는 것(시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많이 기울이도록 한 것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마음으로 보기'를 이 책에서 '정밀 독해(close reading)'이라고 부른다.
...............(중략)..........
시각성이란 이미지에 대한 첫인상의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물이 가진 형식적 구성의 면면들에 표명되거나 내포된 것들과 관련된다. (Visuality does not refer to a prima facie response to image, but rather to what is apparent and implied by aspects of the building’s formal organization.) 이 책의 건물들은 모두 정밀독해를 필요로 한다. 정밀독해는 현재까지 건축의 역사라고 알려진 것을 정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정밀독해란 한 건물이 그러한 독해방식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후략)...(p.16)'
'규범이 일반적으로 이전의 작품에 대한 언급으로서 비평적인 것과 관련된다면, 규범은 텍스트적인 것, 즉 내적인 비평 또는 내러티브로서 자체의 지위를 의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텍스트적인 것이란, 텍스트가 개념과 사물의 가독적인 차원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개념과 사물에 연결된다는 데리다의 개념을 가리킨다. 이 책의 맥락에서 보자면 텍스트적인 것은 다이어그램의 형태로 표현된 아이디어들과 연관되기도 한다. 이들 다이어그램은 설명적이거나 분석적인 장치로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구성(organization)을 더 드러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중략) ........
이 책의 열개의 건축물은 그 건물이 정의하고자 하는 논지, 즉 텍스트적, 형태적, 개념적 전략을 정밀독해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논지의 받침점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유명한 건물은 아니지만, 기표와 기의, 주체와 객체, 형식과 내용, 그리고 도구성과 담론 사이의 관계가 첨예한 초점으로 다가오는 시기를 가리킨다.(p.22)'
'건축물은 형식적 해석과 더불어 텍스트적으로도 동등하게 읽힐 수 있다. 이 때, 기존의 정립된 건축적 어휘에 반하는 다른 종류의 해석이 필요하다....중략....텍스트적인 것은 대상의 물리적 존재 밖에서의 해석, 혹은 그것의 존재를 지배하는 내재적 구조에 대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p.28)'
'형식적인 것이 존재의 가치를 선적인 내러티브와 고정적인, 다시 말해 결정 가능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비롯된다면, 텍스트적인 것은 그 안에서 위계성을 내포하는 현존의 내러티브를 보류하고, 대신 단일한 정적인 조건이 아니라 비결정적인 관계를 제시한다.(p.29)'
도구성
건축의 도구성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아야 한다. 기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인 도구성은 건물이 제대로 작동하느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느냐와 관련된다. 굳이 모더니즘의 기능 개념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여전히 도구성을 중심에 두고 건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풍조는 만연하다. 아이젠만은 규범적인 건축의 의미에서 도구성의 개념을 단호하게 던져버린다.
'한 건물의 기능, 구조, 유형 - 건물의 도구성instrumentality-은 건축 분야에서 그 건물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기준은 아니며, 그런 것들이 그 건물의 중요성 측면으로 여겨질 수도 없다. 모든 건물은 서 있고, 기능하고 있으며, 에워싸고 있다. 이러한 측면의 질적 요소는 이 책에서 분석하는 건축물들의 중심 성격이나 주제를 구성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건물이 규범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그 기능이 원활하기 때문이 아니다. 건축물의 도구성은 건축분야에서 그 건물이 규범적인 역할을 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 ....중략......사실 그러한 문제는 건축의 역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 적이 없다.......후략(p.21) '
분류
아이젠만은 50년 동안의 시간 범위안에서 시간 순서대로 다루고 있는 건축물들을 크게 2가지 범주로 다시 분류하고 있다.
우선 건축가 개인의 경력에서 중요한 참조점이 되거나 전환점을 구성하는 건축물들이다. 여기에는 프랭크 게리의 루이스 빌딩, 루이스 칸의 애들러 주택 및 드보어 주택이 속한다. 해당 건축가들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먼 이 건축물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만들어내거나 비판적 입장에서 읽을 수 있'거나,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주장을 구현'하거나, '이론적 파열을 고전적 모더니즘 해석과 더불어 보다 명백하게 정의내린다는 점에서 규범적'(이상 p.20)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다른 건축가들에 의해 다른 해석을 낳는 경우다. 르코르뷔제의 스트라스부르 의사당은 그 자체로도 르 코르뷔제의 자기 비평이면서 후대에 렘 콜하스의 주시우 도서관 계획안의 참조 모델로서도 작용한다. 스트라스부르 의사당은 르코르뷔제 본인이 주장한 5대요소에 대한 스스로의 비평을 담고 있으며 이를 다시 비판적으로 참조하여 계승한 것이 렘 콜하스의 주시우 도서관 계획안인 것으로 평가한다.
'따라서 이 책에 소개된 각각의 프로젝트들은 과거에 대한 인식, 과거와의 단절, 그와 동시에 미래와의 연결 가능성이 담긴 건축의 한 시기를 대표한다(p.21)'
또한 시대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도 있다. 1950~1968년, 1968~1988년, 1988~2000년의 시기 구분을 하고 있다.
1950~1968년 사이의 기간은 '모더니즘의 추상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시대별로 첫 4개의 건물들이 여기에 속하며 '예전 모더니즘 시대와 관련한 정밀독해를 연상시키는 정의와 비평'을 제시한다. 루이지 모레티, 일 지라솔레 주거, 미스 반 데 로에, 판스워스 주택, 르 코르뷔제, 스트라스부르 의사당, 루이스 칸, 아들러 주택, 드보어 주택이 이 시기에 속한다.
1968~1988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하는 다음의 3개 건물은 로버트 벤추리, 바나 벤추리 주택, 제임스 스털링, 레스터 공과대학, 알도 로시, 산 카탈로 공동묘지로 '새로운 사실주의'로 향하는 모더니즘 비평에서 기원한 유사성을 공유하는 건물들을 대상으로 한다. 구조, 재료, 도상학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특징들은 사물의 순수한 물성과 관련 없는 '조직, 유형, 재료의 개념적 함의를 서로 꿰뚫고 있다.'(p.24)
마지막인 1988~2000년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 3개의 프로젝트는 OMA/렘 콜하스, 주시우 도서관, 다니엘 리베스킨트, 유대인 박물관, 프랭크 게리, 루이스 빌딩이다. 뉴욕 MOMA의 해체주의 건축 전시로 시작되는 시기이다. 가장 현대에 속하는 건물들로 이들 건물은 다이어그램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도 각각 수행적이거나, 지표적이거나, 현상학적으로 조금씩 다른 가능성들을 탐구한다. 그에 더해 오늘날 정밀독해가 가진 딜레마를 나타내고 있다.
비결정성
비결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부분 다뤄지고 있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핵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책의 각 건축물 사례는 안이한 독서/독해 행위를 방해한다.In each case, the buildings herein disturb the complacency of the act of reading. 비결정성의 개념은 해석이 더 이상 변증법적일 필요는 없음을 암시한다. 궁극적으로 비결정적인 것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의 해석이다. 이 건물들은 정밀독해의 역사에 침전된 형식적,개념적 통념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모든 건축물의 영속성을 구성하는 것들인 부분/전체, 주체/객체, 직교좌표, 추상성,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모더니즘의 상투어를 공격하면서, 포스트모던 시기의 이 건물들은 광학성 및 존재의 형이상학에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은 한 시대에 의해 시작된 도전은 다음 시대에 상투적으로 변모한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현시대의 건축에 대한 해법이나 가르침은 제시하지 않지만, 오히려 생성의 끝없는 순환의 일부이자 무한한 대체라는 개념으로서 시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첫 건물인 루이지 모레티의 '일 지라솔레' 주거에서 건축가 모레티에 대한 설명과 건축물 자체에 대한 설명에서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비결정성의 의미가 설명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모레티는 절충주의자로도 모더니스트로도 규정할 수 없다. 쉽게 한 가지 사조로 규정할 수 없으며, 최초의 포스트모던 건축가로도 규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일 지라솔레' 주거에 나타나는 '비결정성'은 앞으로 이 책을 규정하는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1950년에 완공된 모레티의 '일 지라솔레' 주거는 모더니즘의 추상성이 부각되던 시기에 역사적 인유(historical allusion)이라는 기법을 최초로 도입한 건축물이다. 그러나 '일 지라솔레' 주거를 이 책의 첫 건물로 선정한 이유가 역사성 도입의 서막을 열었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 지라솔레'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모더니즘 추상성과 구상적 재현을 동시에 보여주는 혼성의 조건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시적이면서 상호 모순된 표현은 하나의 해석, 하나의 의미, 하나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변증법적인 체계가 의문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두 개의 가치가 충돌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일 지라솔레' 주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추상과 구상적인 수사를 나란히 사용하여 진실들에 대한 비결정적 본질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건물이다.(p.28)'
이 지점에서 데리다가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 도입한 텍스트적 재해석 방법으로 인해 비로소 모레티의 '일 지라솔레' 주거를 비결정적 건물로 규정할 수 있음을 밝힌다. 그 이전 벤험의 경우 '일 지라솔레'를 '로마 절충주의를 규정하는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규정한 것과 대별되는 지점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렌즈로 바라보았을 때 어떤 현상들은 명료한 해석이 불가능해지고 오히려 비결정성으로 규정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며 설명을 이어간다.
'모레티는 역사적 수사와 모더니즘적 수사가 만드는 관계의 비결정성에 따라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이다.(p.29)'
비결정성의 개념이 텍스트적으로 해석된 각 건축물들의 사례들을 통해 반복되어 소환되며 20세기 후반기 포스트모던 역사가 개별 건축가들에 의해 어떻게 변모해 왔는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 만큼이나 개별 건축물들의 구체적인 지점들에서 발견되는 비결정적 요소들을 하나씩 읽어가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이론가가 아닌 실무 건축가로서 시대를 읽고 어떻게 건축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건축적 표현을 비평/비판적으로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풍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책의 도판에 대해 얘기하자면, Lateness에서는 새로 그린 도판들 위주로 설명했다면 이 책에서는 각 건축물의 원 도면 스케치, 사진들 그리고 새로 그린 분석적 투상도들을 함께 활용해 이해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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